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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정치인

시진핑을 알아보자 – 이슈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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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을 알아보자 이슈의 인물

 




중화인민공화국의 제7대 국가주석이자 제 5대 중국 공산당 총서기,

8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짧게 말하면 2012 11월부터 중국 지도자.

 

태자당의 주축으로, 같은 태자당이지만 보시라이와 같은 강경파가 아닌 온건파 지도자에 속한다.

 

시진핑 생애

 



산시 성(陝西省)에서, 혁명 원로로 부총리였던 시중쉰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렸을 때는 부러운 것 없이 자랐으나 1962년 류즈단 사건에서 시중쉰이 펑더화이를 지지하다

반당(反黨)집단으로 몰려 오지로 처분되었고 산시 성 시골로 하방되어 불행한 시절을 보냈다.

이 때 토굴에서 7년간 힘겹게 살았고 이 때부터 극단적인 이념에는 질색을 하게 되었다고.

 

소시적부터 리더십이 있었는지 하방당한 곳에서 노동자들을 지도하여 최고의 생산량을 올렸다고 한다.

 

시진핑은 1970년대에 명문 칭화대학에서 공정화학과를 졸업하고 공산당에 여러 번 입당 퇴짜를 맡다가 겨우 입당,

정치 생활을 시작했으며 마오쩌둥이 죽은 후 시중쉰이 덩샤오핑에 의해 복권되자 베이징으로 돌아오며 본격적인 정치이력을 쌓기 시작한다.

 

정치 생활의 대부분을 푸젠 성, 저장 성 등 동남부 지방 정부에서 지냈는데,

2007년 상하이 시 당서기를 지내면서 장쩌민과 주룽지의 파벌인 상하이방과도 관계를 맺게 되어

태자당과 상하이방 양쪽의 후원을 받는 거물로 성장했다. 2008년에는 국가 부주석 직에 올랐다.

하지만 이때까지 보시라이와 리커창에 비해 외국에 덜 알려졌으며 한국에서도 그가 중국의 주석에 오를 것으로

미리부터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부주석을 지냈던 쩡칭훙 외에도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지지와 후원

모두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부주석으로 있다가 2010년에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 직에 오르면서

후진타오를 이을 차기 지도자로 공인되었다.

 

영국 주재 대사의 딸이었던 첫 아내와는 성격차이로 이혼한 적 있고,

재혼한 현 부인 펑리위안은 중국 인민해방군 예술단 소속의 가수로

중국의 국민가수로 불리는 사람인데, 펑리위안의 인기도 시진핑의 권력 상승에 도움이 되었다.

 

 

시진핑 권력 장악

 


전임인 후진타오 주석이 전전임인 장쩌민이 자기 권력을 내놓지 않겠다고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계속 유지하는 바람에 5년동안 반쪽짜리 권력만을 유지하였으나,

시진핑은 2012년 중국 공산당 제 18회 당 대회 때 후진타오로부터 당 총서기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동시에 이양받았고 2013 3월 후진타오의 국가주석 임기가 끝나면 국가주석 직을

승계할 것이 확정되었다. 따라서 2012년부터 별 일이 없는 한 2017년의 연임을 거쳐서 2022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국 공산당 전체를 이끌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파트너인 국무원 총리직은 리커창 현 총리가 맡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예정대로 2013 3월 열린 중국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명목상 중국의 최고 국가 의결기관이다.)에서

3 14일 정식으로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대외관계

 


시진핑은 국가 부주석일 때 멕시코를 방문하여 "우리는 혁명을 수출한 적이 없고 배고픔을 수출한 적도 없으며

상대를 괴롭히지도 않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한가한 서방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한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중국이 개혁개방 30년을 지나 경제가 계속 발전하고 국민의 삶도 제고되고 윤택해지면서

이는 중국에 대한 서방의 간섭에 그가 대응하려는 방식을 예견한 것이었으며 중국의 국력 증대와 국제적인 위상 상승,

세계금융위기 이후 미국 패권의 상대적인 위축 등으로 중국이 세계 평화와 번영에 대해서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주목받고 있다.

 

그는 제 18회 당대회에서 취임 기자회견 이후 중화문화의 부흥에 대해서 강조했고 채택된 내부 정치보고 문안에서는

"국제적 위치에 맞고 국가 안보와 발전 이익에 부응하는 강한 군대를 건설하는 것이 전략적 임무"라고 명시함으로써

태평양 지역에서 이제는 미국과 대립각을 세워 국가 안전에 대해서는 국가지도자로서 양보하지 않을 것임을 피력하였다.

 

북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중국의 안보 문제와 관련해 북한의 핵보유에 반대한다는 입장이 훨씬 단호하고 국제적인 규범을

성실히 이행할 것임을 천명하였지만 북한의 동향이 줄 영향에 대해서도 관심이 크므로 북한에 대한 전통적인 외교경제적인

후견인 역할이 어느 면에서 한국과 안정적으로 공조가 이루어져 변화하고 조정될 수 있는지 주목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현 박근혜 대통령과 친분이 깊고, 박준영 전라남도 지사, 새누리당 정몽준 전 의원,

새정치민주연합 손학규 고문, 삼성 이건희 회장, 현대차 정몽구 회장, 포스코 정준양 회장 등 한국의 많은

재계 인사들과의 교분도 깊어 지한파로 알려져 있으며,

예전 중국의 지도자에 비해 한국과의 관계 발전에 더욱 관심이 많다고 한다.

 

그러한 점이 작용했는지 2014 7 3일 대한민국에 방한하게 되는데

중국과의 수교 이후 처음으로 최고지도자가 전통적인 동맹국인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을 먼저 방문하는 케이스가 되었다.

 

 

예상되는 시진핑의 행보

 

 


폭발적인 성장에 따라 부작용이 확대하는 것을 감안, 개혁으로 국가 동선을 움직일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으로 문제시되는 부정부패를 감시, 처단하는데 힘을 쏟고, 역시 세계적으로 문제시되는

빈부격차에 대해서도 줄이는 노력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성장과 복지에 모두 관심을 가질 것이며 중국 국내에서 2000년대 후반기부터

문제시되어오던 한자녀 산아 제한 정책은 시진핑 시대를 기점으로 폐지되었다.

 

1%의 국영기업이 40%의 비중을 차지하는 경제에 대해서도 메스를 댈 듯하다.

하지만 중국 내 기득세력과 개혁세력의 복합적인 이익관계를 조정해야하는 입장이고

게다가 사회적 혼란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정치와 법 분야의 개혁은 안정적인 기조 위에서

실행이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경제 면에서도 마찬가지로 민간기업의 몫이 늘어나겠지만

전면적으로 정부와 무관하게 시장에 권한이 집중될 것으로 보기 어렵다.

 

임기 초반부터 개방개혁을 우선 강조하며 강한 의지를 보였으나

이에 대해선 중국이라는 나라의 특수성으로 볼 때 보수세력과 인민들로부터 견제도 받았던 것 같다.

그가 혁명 유적지를 찾기 보다 개혁개방 1번지인 선전을 방문해 덩샤오핑 동상에 헌화한 데는

정서가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재 자신의 정책을 실행해나가는 상황이며 계획생육정책의 골자인 한 자녀 정책을

부모 중 한 쪽이 한 자녀일 경우 둘째까지 허용하는 방침이 그중 하나이다.

노동교화소 폐지도 정책으로 실행된다고 하였는데 정식으로 폐지되었는지 아직 확인되진 않았다.

대대적으로 출범한 전면심화개혁영도소조 조장도 직접 맡고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국내외 현안 전반에 걸쳐 추진작업을 해나갈 것이라고 한다.

 

다만 중국 국가와 체제에 대한 변화를 근본적으로 꾀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이고,

미국과 똑같은 정치제도의 시행에는 부정적이며,

이 점에서는 중국의 통치자로서 다른 중국 권력자와 다른 것이 아니다. 2013 8월 뉴욕타임스 기사.

 

종합하면 이런저런 전향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중국의 안정에는 조심스럽고 신경써야하는 부분

역시 많기 때문에 전반적인 변혁은 이를 감안하면서 중국 내에서 역시 문제가 되어온 부분에 대해

적극적으로 변화를 꾀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2014년 들어선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면서 자신의 친인척들에게

재산을 처분하고 대외투자를 줄이라고 압박하고 있다고 한다.

반부패 주창 시진핑, 누나 등 가족들에 재산 처분 압박 시진핑이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2007년 이후 친인척들의 재산이 크게 불어났다고...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

 




 

독립을 요구하는 신장 자치구의 독립 운동가들을 상대로 왜구라는 표현을 상대하며

공공연하게 비하하고 있으며 단호한 대처를 요구하고 있다.

즉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적 정책을 포기할 생각이 없으며

오히려 스스로 탄압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가고 있다는 것.

 

2014 6 25일에는 독립운동 혐의로 113명에게 중형을 선고하였다.

문제는 69건의 재판중 4건의 재판의 판결 내용만 공개하고 나머지는 전부 비공개로 돌렸다는 것.

즉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무차별적으로 체포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고 있는 것이다

 

무력으로 소수민족을 억압하면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중형을 내리는

그의 통치 행위는 일제시대의 야만을 연상케하는 구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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